성수수제화타운(www.ssst.co.kr) 명장 저부_김명식 (1942년생, 해원제화 기술자) 경력 57년
“5.16직후 김종필씨가 이태리에 가서 구두를 하나 신고 왔는데 그 구두가 대유행을 쳤지요. 국무총리 구두라고, 당시 톱스타인 신성일, 박노식이 와서 맞춰가고 그랬어요”
저부는 신발의 바닥면이다. 갑피에 겉창과 중창과 굽부착 작업을 진행한다.
올해로 구두경력 57년인 김명식씨가 고향 정읍을 떠날 때 나이가 13살이었다. 6.25 후라 먹고 살기 힘들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. 구두와의 인연은 우연이었다. 전차를 잘못타서 효자동 종점에 내렸는데 배가 고파서 요기를 할 곳을 찾게 되었다. 빵집인 줄 알고 들어간 복덕방에서 주인의 동생이 일하는 양화점을 소개받았다.
전후 명동에는 양화점이 세 곳이었다. 칠성제화, 황태자 양화점, 상해 양화점, 당시는 자제가 귀해 가죽 하나 놓고 신발을 만드는 상황이었다. 그만큼 기술자들이 대우받는 시절이었다. 구두기술자들은 인력거나 시발택시(군용 지프를 개조해 만든 택시)를 타고 다닐 정도로 벌
이가 좋았다. 하지만 견습생활은 쉽지 않았다. “그때만해도 손으로 광을 냈으니까, 처음 가서는 찹쌀로 풀 쑤고, 제화용 실을 꼬고 칼 갈아놓고, 어깨 너머로 기술배우면서 공장에서 자고 먹고 하면서, 벌이라고 해봐야 선생이 한 달에 한 번 머리 깎으라고 돈 주는 정도지” 그도 당시엔 기술자가 없어서 하견습에서 상견습까지 빨리 올라갔다고 한다. 버스 안내원이 있던 시절이 구두 경기가 제일 좋았다고 한다. 특히 롱 부츠가 인기였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였고, 학생 골프화 스타일이 인기를 끌었었다. 서대문에 있던 금강이 명동으로 오면서 서울 의 구두업계 양대 산맥을 구축했다. 칠성제화의 22년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성수동 저부 분야에서 장인의 길을 걷고 있다.
김 장인은 "신발 이게 굉장히 공이 많이 들어가는 거예요. 우리가 이렇게 막 신으니까 모르지 말도 못하게 많이 들어가요..."
13살 때 구두제작을 시작한 후 평생 한시도 가죽을 놓은 적 없는 거친 손.
우리나라 구두제작 기술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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